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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헷세에게 띄우는 편지

작성자
성천
작성일
2008.09.0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3720
내용
Hesse에게 띄우는 편지

세기의 대문호 Hesse여, 지금으로부터 91년전, 당신이 루가노(스위스)지방에서, 일차대전을 보내면서 암울한 14년을 수채화를 그리며 소일할 때에, 당신은 아래와 같은 글을 적었어요.
"...저 창백하고 허약한 회칠벽이 어떻게 하늘로부터 푸른 색조를 끌어오고
대지위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를 아무도 보지 않는다. 어떻게 저 비밀스런 장미가
미모사의 나붓거리는 초록속에서 웃고 있는지, 이웃집의 거무스레한 황토가 산의 짙은 초록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그리고 옆집 뜨락의 사이프러스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나뭇잎의 물결을 짜맞추고 있는지를, 이러한 색채의 음악이
바로 이 맘 때쯤 가장 순수하고 고조된 분위기를 이루며 이 조그마한 세계속에서 색조의 유희, 명암의 단계, 그림자의 똑같은 모습을 띄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는다.
나는 결코 훌륭한 화가는 못된다. 나는 거저 딜레땅뜨일 뿐이다. 그러나 이 넓은 계곡에서 수 천년 동안 이어온 이런 나날과 시간들의 모습과 대지의 주름살, 시냇가의 모습들, 초록으로 뒤덮인 상쾌한 길을 나만큼 가슴에 간직하고 함께 살면서 잘 알아주고 사랑하며 애착을 가지는 사람도 없다. 그러기에 화가는 밀집모자를 쓰고 배낭을 짊어지고 접는 의자를 들고는 온종일 포도밭과 숲 가장자리에서 헤메며 보내는 것이다....이러한 저녁나절을 우리 마을위의 언덕에서 보내는 잠시뿐인 그림시간을 위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찰자도 방관자도 아니며 부러워하지도 평가하지도 않겠지만 더구나 잘 알지도 못한다. 오히려 내 행위에 몰두하면서 내 유희에 홀딱 빠져서 자신들의 행위에 몰두하는 바로 그만큼 굶주린 듯 그만큼 천진난만하게 그만큼 억세게 몰두하는 것이다..."

당신은 참으로 정밀한 관찰로 자연을 보셨고 햇살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 그 자체의 위대한 연출성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느끼면서 자연속에서 하루를 지냅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무도 없다고 말한 것은 잘못입니다. 헤세여, 숲을 담아보겠노라고 모기에 뜯기고 그 아픔도 잊은 채 뙤약빛마저도 무관한 듯 그림에 열중하는 또 다른 딜레땅뜨가, 지구 반대 이켠에도, 또 다른 시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당신은 미처 몰랐습니다. 당신이 남긴 소박한 수채화들이 우리 가슴에 남았듯이 우리의 소박한 그림들은 시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소롯이 남을 겁니다.
가을이 물들인 산야와 감 익어가는 농가의 한 켠에서 우리는,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여 당신이 사랑하던 이 땅의 자연을 숨쉬는 그 날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199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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