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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박 10일간의 여행기

작성자
金剛華
작성일
2006.11.09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934
내용
해가 바뀌고,

작년에 땅밟기를 다니면서 알게된
수원 사시는 두 분 댁에 놀러 가는 일을 계기로
장기 여행계획을 얼기설기 짜 맞추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혼자 여행 다닌다는 건 엄두를 못 내던 일이어서,
이젠 뭔가 좀 바뀌어야겠다고.
달라져야 하노라고 이왕에 내친걸음이었다.

집을 떠나던 날, 내 안에는 두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세상에 대한 자신감 부족과 ,
평생 나를 따라다니던 외로움.

살아온 환경 탓도 했지만 결국에는,
나 자신의 문제라는 걸 직시해야만 했다.
사람과 더불어 사는 일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하는
자신만의 문제라는 걸.


첫날.(1월 8일 토)
수원 부부님의 티파티에 갔을 때는, 정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지껏 내가 살아온 방식이나 생활과는 다른,
하늘나라에 초대되어 온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그날을 위해 준비되었던 듯,
하늘에서도 때맞추어 포슬포슬 함박눈이 내려
은빛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
밤늦도록 나는 꿈꾸는 느낌으로,
달빛그림자 밟는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사랑이란 게 이런 느낌일까.
포근한 눈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

물론 나는 사랑이란 걸 잘 모른다.
그런 일에도 익숙하지 않다.

내일 일정이 아침 일찍 잡혀 있으므로 조금 조급한 심정이 되어,
밤늦게 서울까지 차로 바래다주시는 두 분과 헤어졌다.

인터넷 검색하여 고른 모텔이었지만,
여자 혼자인 것을 알고
누군가 문고리를 자꾸 잡아당기는 듯하여
조바심 속에 하룻밤을 보냈다.


둘쨋날. (1월 9일 일)
어둑어둑한 시각.
서둘러 짐 보따리 챙겨 당일 여행 미팅장소로 향했다.

코스는 영월 선돌, 청령포, 눈꽃열차, 정암사.
관광버스 내 옆자리는 문경이 고향이라는 아주머니가 앉았다.
서울사람들과는 억양이 다르다보니 그이와 나는 쉬 가까워 졌다.

여행객들 대부분이 젊은이들이거나 가족동반이다.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기대했던 만큼의 눈은 볼 수 없었지만,
나룻배로 단종 유배지 청령포를 건널 때는
고립된 그 형상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그분이 왕비를 생각하며 쌓아올린 돌탑과,
구비구비 가지가 뒤틀려 우람하게 서있는 해묵은 노송 관음송.
그리고 그분의 유배처소는 한 서린 그분의 애끓는 심정을 묵묵히 들려주었다.

혼자 일행과 동떨어져 그분 처소주변을 기웃거릴 때,
선홍빛 선혈이 튀어서 낭자한 방바닥과 문지방에 흩어져 나뒹구는
새 깃털이 한눈에 들어 왔다. 힘센 매에게 잡아 먹혔을 어린 새...
아아∼ 그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이런 모습으로
내게 권력의 속성과 그 비애를 보여주시는 구나.

얼어붙은 강변 유난히 시린 하늘과,
외로이 흔들리는 갈대 잎 고적한 소나무 그림자.
왕방연 시조비 앞에서 그분을 생각하며 다시 눈물이 났다.

영월역에서 버스에서 내려 열차로 갈아타기 전에,
영월오일장 구경을 했다. 중국산 물건들에 밀려 물건자체는
큰 볼거리가 못되지만 시골장에서는 고향의 체취를 맡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영월역에서 태백역까지는 눈꽃열차의 백미구간이다.
근데 어제밤 부실하게 잔 증세가 도져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렸다.

정선 정암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전국 5대 적멸보궁중 하나라 한다.
이 코스를 선택한 이유중 하나는
지난해 여름 이지누 선생님이 EBS 테마여행 찍으신 장소가 거기이기 때문이다.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앞에 있는 자장율사의 주장자 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자장율사가 내리꽂은 주장자가 지금의 자작나무?로 변신해 있다.

그날 같이 동행한 일행중에서,
한 외국인의 용모가 눈에 띄길래 영어공부나 해 볼까 하고 접근했다가
대뜸, 옆에 같이 온 여학생을 가리키며 자신의 'future wife'라고 하는데 놀랐다.
누가 뭐래나..투덜투덜..요새 젊은이들이 부럽다.

컴컴해져서 서울 도착했는데,
다시 '오늘 밤은 어디서 자나'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 처지론 아무래도 사우나찜질방이 제격이다 싶어,
갖고 다니는 서울시 지하철노선도에
미리 빨강(모텔) 노랑(사우나찜방) 표시해둔 여러 곳 중에서 이태원을 낙점 찍었다.

이태원랜드. 흐흐. 인터넷 서핑으로만 보던 곳이지만
개별난방구조로 된 개인용 여자수면실이 딱 내가 바라던 거라서,
제주도 여행패키지에서 4성호텔 묵은 거 빼곤 내리달아, 거기서 숙식을 해결했다.

여탕에는 여러개의 욕조가 있었는데,
정말 내 눈을 의심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이, 이럴 수가!?? 나. 남자의 커다란 거. 거시기 모양들이 물을 뿜어올리는 중이었다.
으으 -.-;;; 혹시 남탕에는 여자의 거. 거시기들에서 물이 뿜어 나오는지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람.
(참고로, 금토일을 제외한 월-목요일은 홈피에서 티켓 프린트해가면 50% 할인됨)



세쨋 날 ( 1월 10일 월)
밖에 나다니기 싫어서 찜방 시설구경하며, 부산과의 차이점에 감탄하였다
∼ 역시 서울은 달라! 거기서 동갑내기 영천아지매와
서울래기 올드미스를 만났다. 음음. 다들 고민들이 많구나!



넷째 날 ( 1월 11일 화)
드뎌 2박3일 제주도 여행패키지 시작이다.

새벽부터 잠을 설치며 서둘렀더니 미팅시간보다 무려 두시간이나 남아
공항대기실에 졸면서 기다려야 했다.
헐값 패키지라, 밥은 개인이 각자 해결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따로 방값추가비 (하루에 이만오천원)를 내야 했다.

제주도에 도착하니 하늘이 꾸물꾸물하다.
가이드가 조심스레 비양도에 갈까말까하는 이야기를 꺼낸다.
어쩔 수없이 가기는 하겠지만 서둘러 돌아올 배편을 예약해 놨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한라산 1100도로는 폭설로 아예 통제되었다지 않는가!

오∼비양도. 아쉽지만 섬에 들어간지 한시간동안 해안도로만 돌다가
(원래는 비양봉에 오르는 걸로 되어 있었는데)
풍랑치는 바다를 빠져나왔다.



다섯째 날 (1월 12일 수)
서귀포로 향한 날씨가 봄날처럼 화창했다.
원래 서귀포 기후가 시내와는 대조적이란다.
제주도의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물빛과 하늘.
이중섭 생가와 미술관에 들렀다.

이중섭.
그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자화상과 그림들을 보며 나는 단박에 그와 친구가 되었다.
내가 그림을 그렸더라도 그와 비슷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의 그림들에는 소를 닮은 단순소박한 우직함과
길들여지지 않은 원시적 천진성이 있다.
그리고...눈물나게 서럽고 외로운 영혼이 느껴진다.
길위에 쪼그리고 앉은 소년을 닮은 그의 자화상을 뒤로 한채 나는 자꾸 눈물이 났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썼던 샐린저의 은둔과 고독이 느껴진다.
샤갈의 고향마을 그림에서는 '말'이 친숙한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사람은 자신의 살아온 배경을 통해 사물을 이해한다.

마라도는 바람이 세찬 곳이었는데,
꼭 남극에 온 것같이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는 나처럼 혼자 온 24살 짜리 멋진 남자 대학생이랑 짝이 되어 돌아다녔다.

농약을 치지 않은 서귀포 감귤은 정말 달고 맛있었다.
귤이 너무 싸서 굴러다닌다.
지삿개, 천지연폭포 관광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숙소 주변 토속음식점에서 직접 담근 술을 조금 사니,
귤을 한보따리 건네준다.



여섯 째 날 (1월 13일 목)
도깨비 도로, 일출랜드, 섭지코지를 다녔다.
섭지코지. 흐음. 외국에 가도 이만한 곳은 없을 듯 싶다. 이. 이런곳이...

말타기 체험 끝내고, 종달리 해안도로 지나
해녀촌에서 전복죽을 먹었다.
아들과 둘이서 온 젊은 아저씨가 회랑 문어접시도 맛보라며 건네준다.
참말로 싱싱하고 맛있다. 전복죽도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즉석에서 노처녀들 팀 세명과 아저씨랑 어울려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물론, 연락처도 교환하고.
나랑 비슷한 백수들이 참 많구나!




이레 째 (1월 14일 금)
여러 날 돌아다니다 보니,
중간 중간 휴식이 필요하단 걸 이젠 깨닫게 됐다.

그래도 오후에는 좀이 쑤셔서,
서울 사는 노처녀(박미숙씨)와 오후미팅을 약속했다.
비원과 창덕궁 구경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인사동 오래된 건물 전통찻집은 안과 밖이 다르다.
껍데기만 보고 들어갔다가 내부가 의외로 썰렁하게 느껴진다.
앞에 앉은 노처녀에게서 내 궁상맞은 모습이 투영되어서일까.
그네의 사회생활이야기 듣다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여드레 째 (1월 15일 토)
아침 일찍 당일코스 관광버스에 올랐다.
거의가 젊은이들인데, 젊다는 것만으로도 다들 눈부시게 예뻐 보인다.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그런대로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월정사 주변음식점 산채비빔밥이 참 맛있었다.
음식점 뒤뜰 난로에 있는 군고구마가 후식으로 제공되었다.

방아다리 약수터와, 봉평 허브나라로 해서 서울로 돌아 왔다.





아흐레 째 (1월 16일 일)
여행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남이섬 행이다.

대학교 졸업여행 때 가본 그곳을 이번에 꼭 가고 싶었다.
그래서 일정이 이렇게 늘어난 거고.

세월. 세월이여∼
지금은 겨울연가 열풍땜에 드라마 세트장으로 변해 버린 그곳은
내국인 뿐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다.

한편의 드라마를 통해 거기를 찾은 그들과,
2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 내가 그곳을 찾은 것과.
묘한 감회가 소용돌이 쳤다.

사는게 한없이 슬프기만 했던 어린 날들과,
사막같이 황량하고 막막했던 지나온 젊은 날들, 그 우울들 사이를
남이섬에서의 빛바랜 추억과 더불어 걸어보고 싶었던 나와...

환상이 환상인줄 알면서도 환상을 쫓아 다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사람들에게서 확인한다.


중간에 구곡폭포에 들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은 것일까.
무얼 찾아 여기 까지 온 걸까.

이렇게 서리내린 머리모양을 하고
얼어붙은 겨울산 폭포를 찾아가는 나는.

계곡물과 폭포는 얼어붙었지만 얼음장 밑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아아. 너무 싱그럽고 아름답다.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

강촌역 바로 옆에 자리잡은 강촌라이브 카페에서 석식이 제공되었는데,
지금은 '흘러간 세대'의 향수만 남아 쇠락한 풍경이지만,
산과 물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다리가 걸쳐져 있는
덜컹거리는 열차역 주변풍경은 볼 만 했다.

20년너머 묵은 카페에선 옛날처럼 주인장이
통기타반주로 70∼80년대의 낭만을 들려주었다.
거기서, 열차시간을 조금 앞두고 내가 기어이 마이크를 잡고 말았다.

앵콜곡까지 받고 내려오니, 그때까지만해도
혼자 다니던 나를 생뚱하게 쳐다보던
일행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있었다.
청량리역에서 헤어질 때까지도
나를 자꾸 돌아다보던 눈빛들이라니.
흠흠. 갑자기 팬이 생긴 기분.

30살짜리 남녀 커플과, 주인장의 명함까지 받아들고서는
하마터면 내친김에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뻔했다.
서울에만 살았어도 주말 알바쯤은 기꺼이 수락 했을텐데. 쩝쩝.
(내 어릴적 꿈이 가수였건만도..)




열흘 째( 1월 17일 월)
여러날 피곤이 겹쳐서 온몸이 욱신거린다.

찜질방에 온 값을 오랜만에 톡톡히 치뤘다.
역시 찜질방이 좋아.
오후가 되니 내려가고 싶어 지면서,
가서 하고 싶은게 많아졌다.

오후에 열차시간 기다리며 서울역 역사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옷가판대에서 누가 옷을 들고 있길래 '응응. 괜찮구나.' 하면서
옆을 돌아 본 순간. 어엉? 이게 누구더라.
영문과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
20년 전에 비해 좀 부었기는 하지만, 내 추억속에선 여전히 이쁜.

나더러 대뜸 교수하느냐고? 아니라고... 백수라고.
남편이 근무하는 포항공대 연구실로 꼭 찾아오라며,
열차시간이 임박해 황황히 떠나는, 이젠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
아_ 세월이여_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려가는 밤기차안.
철로변에 군데군데 쌓여 허연 빛을 발하는 눈을 보면서,

처음에는 나홀로여행이 두려웠지만
차츰 여행은 사람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준다는 생각을 하였다.
대체로 경직되게 살아왔건만
이제는 혼자 다녀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된 탓일까.

여행지에서 사람들도 만나고 돌아다니다 보니, 또 집에 가고싶어진다.
집에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자연과 사람들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서 일까!

암튼 늘어져 잠자고 있던 시계가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고
째각째깍대는 소리가 들린다.

암암. 이제 시작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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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길

    10일을 그렇게 보낼 수 있다는 자체가 부럽군요. 이중섭 미술관엘 가면 이 중섭은 없고 객들의 그림만 가득하듯이 나를 찾아 헤매이면 나는 이미 집에 와 있고, 오양간에 매어두었는가 햇더니 아무 것도 없다는 <심우도>를 닮았어요. 나는 찾아 헤멘다면 파랑새 여행이 되겠지요. 나는 어제나 '거기'에 있건만...(글솜씨가 대단하시네요)

    18 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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