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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굴뚝 없는 집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11.03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3042
내용
굴뚝 없는 집
김 종 길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신환자가 들어 왔다. 말쑥한 용모에 잔뜩 낀 먹구름이 끼었다. 삼십을 갓 넘긴 전문직 신사였다. 이 좋은 나이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궁금해지면서 면담이 시작되었다.

몇 주일 전에 모르는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더란다.
“댁의 부인이 내 남편과 바람이 났는데 알고 있나요?”

아니 그럴 리가 없다고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젊잖게 끊었다. 아내는 큰 기업체에 근무하는 똑똑한 여자이고 아이도 잘 키우고 있는데 웬 뚱딴지같은 전화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음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도 들은 말이 불쾌하여 그 일로 작은 말다툼이 일었고 아내는 적극 오해라고 하여 안심하였는데 며칠 후에 편지가 한 통 왔다. 전화를 했던 여자가 남편의 컴퓨터에서 인쇄해낸 편지 뭉치였다. 거기에는 아내가 남자 친구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보낸 연정을 담은 내용들로 가득하였다. 보고 싶어 죽겠다는 둥 설마는 사실로 들어나 있었다.

젊은 혈기는 꼭지가 돌아가는 기분이 되어서 당장 넷이서 만나자는 제의를 하였고, 그 놈을 늘씬 패 줄 거라고 작심하였다. 맞닥뜨린 현장에서 그는 절망감을 느꼈다. 남자 옆에는 둘째를 가진 만삭의 아내가 죄를 진 모습으로 있더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거듭 머리를 조아리는 사내 앞에서 그는 어렵게 자리를 마무리하였다. 아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친구들 서넛과 대화를 갖고 아내의 부정을 용서하기로 결심하였다.

“두 분은 성격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요?”
“저는 내성적이고 아내는 쾌활하고 명랑합니다. 둘 다 막내이고요...”

빗나간 두 남녀는 시험을 준비하던 기간에 서로 알게 되어 서로 돕다가 채팅을 나누기 시작하여 지난 두 달간 뜨거운 관계로 발전하였고 실제로 깊은 관계는 없다고 하였다.

나의 컴퓨터 안에도 흔히 환자들로부터 연서보다도 진한 내용의 애틋한 편지들이 온다. 이성의 문우들에게 장난기 어린 편지를 쓰기도 한다. 하마 그런 내용을 저들같이 카피 당했다가는 경칠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을 일이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오해될 내용들을 삭제하고 주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결혼 3년간 정말로 아내를 신뢰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고 했다. 아무렴, 얼마나 행복했겠나. 부모님들은 다소 불화가 심했기 때문에 자기의 인생은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였는데, 이제 배신감으로 두통과 우울로 괴롭다고 하였다. 심리검사는 그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사이 좋지 않은 부모님을 모신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나름의 노력을 하였으나, 뚱하고 자상하지 않은, 매력이 적은 사내가 되었던 모양이다. 아내가 항변하듯 부분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터이다.

믿고 있던 아내로부터 배신당한 기분, 나는 요즈음 이런 사연을 예전보다 자주 듣고 있음을 상기하였다. 세월이 참 많이 변했다. 일년 전 어느 오전에는 불과 세 시간동안 세 여성이 혼외정사를 고백하는 면담을 하여 그날 종일 울적하였던 기억이 있다. 과거 진료실에서 듣던 외도는 아내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남성 전유물이었다. 이제 남자들이 과거의 아내들이 겪는 아픔을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 배신의 아픔은 정말 아물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최신의 지견들은 사랑하는 상대를 상실하는 아픔이 일반 재해보다도 더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는 분이 알뜰히 모은 재산으로 자신의 집을 짓기로 계획을 하였다. 마침 친구 중에 건축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건축 일체를 맡기고 멋진 집으로 이사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침내 집을 다 지어서 집을 둘러보다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집은 좋은데 굴뚝이 안 보여 설계가 특별한 걸로 알고 물었더니, 어이없게도 “아, 굴뚝을 만들어야겠네.” 시원스레 답하더란다. 모든 걸 믿고 맡겼건만 이 무슨 일처리란 말인가. 다시 뜯어 제키는 모습을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는 경험담이다.

믿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조건 믿는 것은 의존심이 큰 탓이기 때문이다. ‘친구, 네가 전문가이니까 알아서 다 해주기 바란다’ 한다던지 ‘나의 배우자는 전적으로 믿을 수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식은, 의존심은 만족시키지만 현실적으로 배우자를 도망가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절대 믿지 말라’ 고 하였다. 그 말의 참뜻은 이렇다 - ‘먼저 의심하라 그리고 믿음이 가거든 그 때 믿어라‘ 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주체는 나니까 우선 나의 판단이 확실하다고 판단할 동안은 믿음을 유보하라는 가르침에 나는 절대로 수긍한다.

외간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한 아내가 ‘내가 그렇게 된 것의 40%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고 남편에게 당당하게 말했단다. 아내는 양심이 있어서 반반이라 아니 하고 반에서 10%를 양보한 셈인데, 그 이유가 ‘당신이 무뚝뚝해서인데, 나는 자상한 남편을 원한다.’ 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 남편이 심리검사상에서 ‘내 탓이요’ 하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는 외도의 책임 상당부분을 떠넘기는데 성공한 셈이다.

한 분석가의 글에 ‘우리가 행복하려면 적어도 세 번을 결혼하는 게 좋다. 젊어서는 나이 많은 상대와 그 다음에는 동년배와 그 후에는 보다 젊은 배우자를 택하여 한다. 그러나 일부일처의 풍속에서 살고 있으니 우리 자신이 세 번 변화하는 수밖에 없다’ 라고 썼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앞으로 두 번을 더 변해야 행복할 수 있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변화해 보겠다고 답하였다. 당분간 그는 항우울제 복용도 필요할 것이다.

늦게나마 굴뚝이 없는 집인 것을 깨달은 셈이니 이제 구들장을 뜯어서라도 굴뚝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굴뚝이 없다고 다 때려 부수고 새 집을 짓는 일보다는 훨씬 수월하고 경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편의 일편단심이 ‘아내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편단심이 여성의 전유물만은 아니질 않은가.

<2005, 창작수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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